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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생이다. 처음 근무하던 학교는 실내화를 신어야 하는 학교였다. 어느 날 퇴근길에 신발 단속의 최고봉 생활지도부실 앞에서 신발을 신고 있는 아이를 보았다. 바쁜 퇴근길 그냥 지나칠만도 하지만 집요한 성격이 발을 붙든다. 자- 파이트!!

 

와아- 신발 예쁘네. 화기애애함 뒤에 긴장감이 숨어있다. 신발 벗을까? 긴장감이 얼굴을 내민다. 나중에 벗을게요. 지금 벗자. 당겨진 시위같이 팽팽하다. 가던 길 가세요. 폭발은 금물이다. 너 기분 나쁘지 않게 하고 싶어하는 말을 그렇게 받으니 모두 안 좋지 않아? 이런저런 실랑이 끝에 이 말을 끝으로 결국 아이는 신발을 벗는다. 그때부터였다. 40분 거리의 출퇴근 길에 신발 주머니를 들고 다닌 것이. 나보다 힘이 약한 사람과의 만남에서는 특히 나를 낮추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북향화는 봄을 대표하는 꽃 중의 하나다. 북향화는 신을 향한 꽃이란다. 아내가 있는 줄 모르고 연모한 북쪽 바다의 신을 그리다 죽은 공주. 그곳에서 피어난 꽃이 바로 북향화란다.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냥 붙인 이름인지 몰라도 우리가 봄철에 흔히 볼 수 있는 요즈음의 북향화는 이제 신을 그리지 않는지 그 꽃봉오리를 제멋대로 피워내는 것 같다. 단아한 색감에 크고 화려하게 피운 꽃들은 마치 꽃봉오리 하나하나가 신이라도 된 것처럼 피었다모르긴 몰라도 모두가 한 곳을 향하는 것보다 지금이 더 아름답겠지. 그렇게 북향화는 존중의 새로운 경지로 나를 이끈다.


한 줄기와 한 뿌리를 공유하는 꽃들은 각자의 아름다움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위로하듯 다가온다. 나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높이는 것이 존중의 미학이다. 제각기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것은 저마다 제 멋을 지녔다는 의미이다. 아이는 아이대로, 선생은 선생대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책임의 정도가 존재의 가치를 가늠하는 잣대가 될 수 없음을 누구나 기억해야 하겠으나... 아이들보다 더 큰 권한을 가지는 어른이자 선생으로서 아이들을 신으로 여기는 마음은 꽃마다 제 멋을 한껏 피워낼 원동력이 될 터이다. 잊지 말 일이다. 제 멋대로만 피어나지 않고 동무와 선생을 신으로 여기는 마음은 나무를 살리는 과실로 이어질 것이다. 다른 신을 높이는 것이 나라는 신의 고귀함을 높인다는 작은 진리를 이제야 깨우친다.


나를 낮춤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간다는 마음을 먹은지 이제 5정장을 붙들고 4월의 봄을 맞이한 지 3번째다. ‘골든 타임을 놓쳐 가라앉은 배처럼 내 고귀함이 함께 가라앉고 맞는 4번째 봄이다무력함과 미안함에 나를 낮추라는 목소리는 점점 커져가더니만... 기어이 1000일을 넘기고서야 끌어올려진 배와 함께 올해의 북향화가 나도 끌어올려주었다. 해마다 봄이 되면... 이제는 스스로 신이 된 북향화, 아름다운 목련이 우리를 신으로 만들어 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