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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회정의는 22년전보다 얼마나 나아갔나

 

그대에겐 사회정의가 더 중요한가, 아니면 질서(안보)가 더 중요한가?

  미등록 이주아동에 관한 인터뷰를 토대로 써내려 간 작가 은유의 책 『있지만 없는 아이들』은 차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글은 비교적 최근 읽었던 소수자, 이주민에 대한 책 『후아유』를 거치더니, 대학교 1학년 생일 때 받은 따끈따끈한 신작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까지 소환했습니다. 수능을 거쳐 대학교의 문턱에 갓 들어선 여름 생일 선물로 받은 책이었습니다. 작가 홍세화의 글은 어떤 형태로든 제게 흔적을 남겼겠지만 깊숙한 곳 토양의 어딘가에 있었습니다. 은유의 글을 읽고 비교적 최근에 만난 이향규의 글이 생각나 책장을 뒤적거렸습니다. 그 와중에 망명자의 시선으로 본 프랑스와 대한민국에 대한 시선이 담긴 책이 옆에 보여 22년전을 떠올리며 책을 꺼내들었습니다. 모두가 알듯이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를 겪었습니다. 해방이 되면서 후진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빠른 속도로 경제 발전을 이뤘습니다. 그럼에도 밥이 되지 않아 화를 내면서 국산 밥통을 탓하다가 전원 코드가 빠진 것을 보고는 미국 밥통이면 알아서 전원을 꼽아 작동했을거라는 예언적(?) 만화를 보고 자랐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가 된 지 오래이고 유학을 가려고 안간힘 쓰던 나라에서 유학을 꽤 많이 오고 꿈을 안고 찾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다문화라는 말이 익숙하고 특히 대학가를 거닐면 외국인이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불법체류자에서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 미등록 이주 노동자, 미등록 이주아동로 변신한 사람들이 10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아직 더 높은 꿈을 꾸지만 어떤 기준들에서 선진국이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듣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망명자 혹은 아메리칸 드림을 꾸고 바다를 건넌 세대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에게 건너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책으로 엮여서 나오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성장한 걸까요? 지금 우리는 식민 통치를 받던 시절보다 성장한 걸까요? 대한민국은 사회정의와 질서 중 무엇을 더 중요시하는 나라일까요? 22년전 홍세화가 던진 그 질문에 우리는 어떤 답을 하고 있을까요?

세상의 수많은 차별 이야기들 중에서 

  2018년 '창비교육'에서 펴낸 이향규 작가의 『후아유』는 사회의 소수자, 이주민에 대한 우리의 시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향규 작가는 영국 남자와 결혼했고 그와의 한국 생활, 영국 생활과 자녀가 경험한 이야기들을 풀어냅니다. 그 안에 담긴 내용들은 사회가 타인에 대해, 소수자에 대해, 이주민에 대해 어떤 시선을 보내는지에 대한 세심한 사유들입니다. 『후아유』에는 제도적 차별, 정서적 차별 등이 담겨 있습니다. 3년이 지난 2021년 6월 '창비'의 『있지만 없는 아이들』 역시 차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후아유』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최소한의 인정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있지만 없는 아이들』은 제목 그대로 분명 존재하지만 서류상으로 없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유령으로 지내온 거나 마찬가지예요 살아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요.

 

  부모님 두 분 모두 언어와 청각의 중복 장애가 있는 2002년 한국 태생의 마리나는 어릴 때부터 부모의 통역 노릇을 해왔습니다. 마리나는 전자로 봉사 증명서를 받을 수 없어 봉사 동아리에 들어서 신뢰를 쌓아 수기 증명서를 받을 생각을 할 정도로 목표가 확실하고 생각이 깊습니다. 그럼에도 살아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지도 못하는 처지에 지쳐 미래를 포기하고 잠시 드라마와 게임에 빠져 있는 상태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으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이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기는 한걸까요?

  미등록 이주아동은 외국인 등록이 되어 있지 않아 주민번호와 같은 신분을 증명받아야 하는 모든 혜택(?)으로부터 배제됩니다. 통장을 만들 수 없고, 체험학습을 가도 신분이 확인되야 하는 곳에는 들어갈 수가 없고, 아무리 똑똑해도 장학금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의료보험도 안됩니다. 코로나19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QR코드 본인인증도 못합니다. 핸드폰을 자기 명의로 개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학교에도 다닐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이 혜택이라고 생각해 본 우리나라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그런 생각을 해 본 우리나라 아동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취업은 물론이고 이런 당연한 생활조차 불가능한 것이 미등록 외국인들입니다. 아니, 마리나를 과연 외국인이라고 할 수는 있는건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공부하고 한국에서 몰래몰래 일하는 이 아이를 외국인이라고 할 수 있긴 할까요. 다행이라고 할만한 일인지 모르지만 지금은 학교는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등록 아동을 발견한 교사나 경찰이 신고의 의무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걸 진보했다고 부르기에도 참 민망한 수준이지만 조금씩이나마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럼 왜 당신은 한국에 살고 계시나요?

 

  태어났으니까 삽니다. 나이지리아인 부모에게서 1999년 한국에서 태어난 페버는 외국인이 왜 그렇게 한국에서 살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당당하게 답을 줍니다. 그냥 여기서 태어나서 자랐으니까.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할까요. 주위의 도움으로 비자가 생기고 나서 학교 숙제를 이메일로 제출할 수 있는 엄청난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 페버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의 차별이 어디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 되묻습니다. 사람이 사람과 함께 사는데 무슨 이유가 그렇게 필요한 걸까요? 무슨 특별한 자격이 필요한걸까요.

  만약 대한민국 구성원이 될 수 있는 자격 기준이 언어나 얼과 정신을 기억하고 계승하는 등을 포함한 '한국인다움'을 뜻하는 것이라면 학교 숙제를 이메일로 제출할 수 있는 큰 혜택을 받고 있는 우리나라 아이들이나 식당에서 QR코드 본인인증을 할 수 있는 어른들 중에 꽤 많은 사람들의 자격이 불안해질 것 같습니다. 한글 문화권의 사람들은 글자를 읽지 못하는 문맹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은 한글의 우수성을 이야기할 때 자랑거리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인 기능적 문맹률은 매우 높은 편입니다. 어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25% 정도는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상당히 떨어진다는 결과도 있습니다. 여러 교육다큐 등을 통해서 몇 줄의 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아 문해력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경고합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모르는 아이들이 많다는 경고를 듣습니다. 그런데, 우즈베키스탄 부모를 따라 어릴 때 한국에 온 카림과 달리아 남매는 한국 사람보다 한국어를 잘하고 한국어로 시 쓰기를 즐깁니다. 이 남매는 한국의 역사가 재미있어 어릴때부터 따로 찾아 공부를 해도 한국사 인증시험을 볼 수 없습니다. 봉사를 해도 봉사 시간을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너는 나보다 한국어 잘하는데 왜 군대 안가냐?

 

  학교에서 역사와 국어를 제일 잘했다는 카림이 군대간 친구에게 들었다는 말입니다. 이주 노동자 뿐만 아니라 분단 현실 등이 낯설거나 소수이거나 나와 조금 다른 존재들에 대한 시선에 많은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카림 친구의 말은 그 다양한 맥락을 보여주는 것 같아 조금 씁쓸합니다. 이런 카림과 달리아 남매의 이야기는 대한민국 구성원의 합당한 자격을 무엇으로 삼아야 할지에 대한 의문을 남깁니다. 많은 대한민국 사람보다 더 한국인다운 이 남매는 혜택은 커녕 존재조차 인정받지 못합니다.

  은유의 글에서 계속 언급되는 논리, 그러니까 이주 노동자들 때문에 우리나라 인력들이 피해를 입는다는 논리 때문일까요. 이유가 무엇이든 이쯤해서 글머리에 홍세화가 던진 질문으로 돌아가보면 우리나라는 사회정의보다는 질서를 더욱 중요시하는 것 같습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하고 다양성에 대한 관용을 행하는 민주주의의 사회정의 보다는 기존 구성원들에 대한 보호가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낯설거나 소수인 존재에 대한 경계와 차별-차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로 이어지는 것도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차별적인 시선보다는 우리보다 앞섰던 선진국의 차별적인 시선이 더 익숙하기 때문도 한 몫 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과연 어떤 이유가 이런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타국으로 이민간 우리 이민자들의 아픔, 망명자들의 어려움, 그들이 받는 차별에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과연 합당한 걸까요. 우리 사회는 그런 분노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가장 약한 존재를 대하는 방식이 그 사회 인권의 지표이다

 

  아이들을 다루는 방식보다 그 사회의 영혼을 더 정확하게 드러내는 것은 없다는 넬슨 만델라의 표현을 빌려온 은유의 말은 적나라하게 우리 현실을 일깨웁니다. 존재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니. 그렇게나 명확하게 대한민국 구성원이라는 정체성이 있음에도 존재할 권리조차 없으며 아플 때 보호받고 배울 권리에서조차 배제된 아이들이라니. 이것이 우리 사회 인권의 지표일 것입니다. 우리 사회도 이제 저소득층을 포함해 낯선 존재, 소수자에 대한 인권을 더욱 크게 고민해야할 것 같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 사회가 다양한 문화, 그러한 문화를 가진 존재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된 것 같습니다. 책 속 변호사 이탁건의 말은 그런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재단법인 동천 소속 변호사로 난민과 이주민을 담당하고 있는 이탁건은 미등록 이주 노동자들이 오랜기간 이 사회에서 살아올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들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필요하지 않다면 사라졌을 일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2018년 기준으로 외국 국적이거나 외국 국적 부모 아래서 태어난 이주아동만 해도 대략 15만명, 그중 미등록 아동은 약 2만명 정도로 추산한다고 합니다. 아이들을 포함해 그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도 그들을 필요로 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미등록이라는 건 불법적으로, 혹은 필요하지 않은 인원이기 때문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정말 불필요하다면, 그리고 착취든 정당한 대우든 그들이 생계를 꾸려갈 수단들이 제공되고 있지 않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역할이 부여되든 역할이 필요해서 그들이 존재하는 것이든 우리 사회에서 그들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이들을 존재마저 배제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 분명 정당하지 않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18세기 스코틀랜드 출신의 유명한 경험론자인 흄에 따르면 인간의 '자연적 경향성'은 반복된 경험에 의해 습관적으로 믿게 되는 경향을 말하며, 도덕적 판단 등에 있어 이성보다는 감성이 우위를 점한다고 합니다. 요슈타인 가아더는 철학소설 『소피의 세계』에서 이런 흄의 관점을 아주 쉽게 풀어썼습니다. '다른 나라의 대량 학살보다 내 손톱 밑의 상처가 더 아프다. 태풍 피해 소식을 들으면서 손에서 떨어뜨린 컵에 발끝이 콕 찍히는 상상을 해보면 조금 더 와 닿을 것도 같습니다. 요슈타인 가아더는 이어서 나치의 학살이 가능했던 것은 학살에 참여한 독일인들의 이성이 아니라 감성에 문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합니다. 진리는 아닐지 몰라도 우리에게 감성이 중요하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엄마, 사랑해요!

 

  이탈리아 작가 파올라 마스트로콜라의 『내가 누구인지 몰라도 괜찮아』는 쓰레기통 옆 슬리퍼에서 태어나 슬리퍼를 엄마로 부르는 오리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그의 정체성은 슬리퍼였습니다. 어느날 비버를 만나 비버 사회에서 비버로, 박쥐 사회에서 박쥐로, 거듭 변신을 거듭하며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찾아가던 '오리'는 플라밍고와 학 부부에 이르러서야 본인이 오리임을 알게 됩니다. '어디로' 향하는지보다 '무엇'인지가 더 중요하고 그것을 알아낸 것만 같아 기쁜 그 '오리'는 그게 끝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결국 간신히 찾아낸 오리 사회를 떠나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늑대를 만나 정착합니다. 무엇이기에 내 편이고 어떤 것을 갖추고 있기에 우리인 것이 아닙니다. 각자의 잣대가 아니면 배척하는 여러 사회를 거친 그 '오리'는 결국 삶을 살아가는 존재 그대로를 존중하고 수용할 줄 아는 또 다른 존재에게서 위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그냥 사람이죠

 

  미래를 포기하고 게임에 빠져 지낸다면서도 영화 「사도세자」가 재미있어 『한중록』을 읽는다는 달리아는 누구보다 '한국스러운' 사람입니다. 달리아는 사람이 그냥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나아지고 있고 정이 많은 한국 사람들에 대한 경험으로 작게나마 희망을 봅니다. 대한민국 사람이기 이전에 사람이라는 사실을 더 많은 사람이 알게 되면 좋겠습니다. 은유의 글을 통해 제가 이런 존재들에 대해 알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어렵사리 오리임을 사회가 알게 된 '오리'에게도 힘들었던 정착입니다. 미등록 이주아동들이 그 정착을 향한 여정의 출발선에라도 설 수 있도록 대한민국이 빨리 변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가해자입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보호자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때때로 떠올리기만 해도 은유가 프롤로그에서 말했듯 '먼 타인의 아이를 사랑'하는 데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7월 17일 드라마 <악마판사>에서 범죄율 낮은 나라라는 변호사에게 던진 오진주의 일침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범죄율 낮은 나라요? 다 같은 나라 사는 거 아니다.
돈 없는 서민들이 사는 나라는 변호사님이 사는 나라와 다르다.
제발 그 분들 인권도 좀 생각해주시죠. 제발요.